본문 바로가기

공포이야기

(공포 실화)유이태의 치료제 -무서운이야기

유이태의 치료제


조선 숙종(1674∼1720)때의 인물인 백원 유이태(劉以泰)는 명의로 이름난 분입니다.

흔히 드라마 때문에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허준이 더 전의 인물이지요.


거창군 위천면에서 태어나 남다른 재주와 총명을 갖고 의학에 통달하였고

뒤에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에 옮겨 살았는데 천하의 명의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본댁으로 나라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청나라의 강희종이 중병을 앓게 되어 조선의 명의 유이태를 찾는다는 것이었죠. 


숙종이 이를 받아들여 유이태는 두 달의 기한으로 송나라로 왕진을 가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에 이르러 강희제의 병을 진맥하여 보니 천문창(天門瘡)이라고 하는 두창이었습니다. 

이 병은 “남등창 여발저”라고 하여 고름병으로 요즘 말로 세균성 피부병의 일종입니다. 

미생물에 대한 지식이 없던 당시의 의술로서는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죠.

유이태는 진맥을 마치고 객관에 나와서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머리만 점점 무거워질 뿐 별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하룻밤을 지새고 아침 밥상을 대하여 첫술을 드는데 실수로 밥숟가락을 놓쳐 상 밑으로 밥이 쏟아져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쓴 입맛에 이렇게 되니 식욕이 날 리가 없었지요. 

그는 그냥 밥상을 밀쳐두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착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쏟아진 밥풀을 모아서 남은 밥을 모두 합친 다음 객관의 벽에 대고 문질러서 발랐습니다. 

자연히 벽에 붙어있는 때와 함께 혼합이 되었고 그 밥풀을 살피며 차일피일 시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별 처방도 없이 있는 유이태를 보는 강희제와 주의의 시선은 좋지가 못했습니다.

결국 강희제는 앞으로 일 주일 내에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때 유이태 의원은 객관의 벽에 발라 두었던 밥풀을 긁어서 모아 깨끗하게 가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 가루를 갖고 궁궐에 들어가서 강희제의 고름이 나서 헐어진 환부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그렇게 오래된 부스럼이 물기가 가셔지고 차도가 있었습니다. 

이 치료법을 계속 시행하자 썩은 환부가 조금씩 치료가 되더니 한달이 다 되기도 전에 완치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강희제는 말할 것도 없고 청나라의 온 조정이 떠들썩하게 유이태 의원을 받들게 되었죠. 

그리하여 두 달의 말미도 다 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니 

강희제는 유이태 의원에게 평생을 두고 품어온 큰 소원 한 가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유이태 의원은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고 하니 

강희제가 자기의 뜻을 사양하지 말고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므로 할 수 없이 소원을 말하였는데 

“옛부터 가산이 넉넉지 못하여 선대의 산소에 석물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 염원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이태의 소원을 들은 강희제는 “조상을 추모하는 정신이 갸륵하다”고 말하면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니 염려말고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어서 서둘러 석공들을 파견하여 3대 양위의 묘소에 석물을 갖추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유이태가 만든 약을 “낙반비벽토(落飯庇壁土)”라고 불렀는데 그 약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화제가 무성합니다. 

벽에다 밥풀을 발랐으니 곰팡이가 슬었을 것이고 

그 곰팡이는 지금의 “페니실린”처럼 항균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종기에 효과가 있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유이태는 명의긴 하지만 허준과 달리 어의를 지내지 않고 민간의로만 지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민간 설화로만 전해질 뿐입니다.



허수아비에 대한 전설


농촌에서 흔히 볼수 있는 허수아비는 사람의 모양을 본뜨고 있는데 여기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 시대 왕도인 경주(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고을에 허수라는 청년이 나이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허수는 소작농의 아들이었고, 집안 형편이 그날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만 

남의 집 품팔이를 하여 받은 삯으로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했죠.


그런데 허수의 아버지는 작은 새를 무척 좋아하여 이따끔씩 곡식을 한 줌씩 꺼내어

마당에 뿌려서 참새들이 날아와서 먹게 해주고는 하였습니다.

허수 아버지에게는 취미이고 좋은 일이었지만,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식량을 새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행동은 허수와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허수는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허수는 이웃마을 부잣집에 품팔이를 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허수가 집을 나선 뒤로는 그날 밤이 늦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늘 저녁엔 들어오는 아들이 오지 않았기에 허수의 부모님들은 애가 타서 싸리문 밖에서 밤새도록 허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새벽이 되어갈 무렵 마을 사람들 서너명이 거적에 싼것을 메고 허수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거적안엔 허수의 싸늘한 시신이 놓여 있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성질 고약한 양반에게 매를 맞아 죽은 거였죠.

허수의 부모들은 기가 막혀 말도 안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허수 아버지는 반 실성한 채 

참새들이 집 마당으로 날아와도 곡식을 주지도 않고 '훠이 훠이' 하며 쫓아버렸으며, 

매일같이 들녘으로 나가서 아들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며 울어댔습니다.


"허수야! 허수야! 불쌍한 내 아들 허수야!"


마을사람들이 만류했지만 허수의 아버지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서 

들에 새만 있으면 통곡을 하며 아들 이름을 부르며 새들들 쫓는 행위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수의 아버지는 들녘에 나가서 정신없이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어대던 탓인지 

그 상태로 몸이 점점 굳어지더니 팔을 벌리고 선 채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통곡했으며 허수의 효와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짚으로 허수아버지의 모습을 따서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세워서 참새를 쫓았다고 합니다.



김유신 장군의 수호신을 사직한 이야기



삼국 유사를 보면 김유신이 수호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외적의 치입을 받았을 때도 김유신 장군의 묘에서 바람이 불어 적의 침입을 알리고 

정체 불명의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기록이 있죠.

이후 신라의 혜공왕(惠恭王, 756~780)은 무능한 왕이었는데 그의 패악을 보다 못한 김지정과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에 참여한 수많은 대신들과 그의 일족까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과정에서 애꿎은 성골인 김유신의 후손들도 대부분 죽임을 당했습니다.


혜공왕 15년(779) 4월에 김유신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춘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그뒤로 무기를 가진 40여 명이 뒤따라 

죽현릉(신라의 13대 미추왕(262~284)의 무덤으로 미추왕의 혼은 신라 수호신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이 목격됐습니다.

능 안에는 소리 내어 우는 듯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습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룬 공이 있고,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죄 없는 자손이 죽임을 당했다고 

이제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은 그만하고 멀리 떠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미추왕에게 얘기했고. 

미추왕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라면서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김유신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세 차례 부탁에도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김유신의 분노 때문인지 무덤 근처를 시작으로 천재지변이 일어나자 

혜공왕은 두려워 대신 김경신(뒷날 38대 원성왕)을 특사로 김유신묘에 가서 사과하고 절(취선사)에서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제사도 시조 박혁거세의 오릉(五陵)보다 위인 대묘(大廟) 위에 둔다 하여 가까스로 김유신의 넋을 달랬다고 합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신라가 망한 후 고려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 1330~1374)때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계혁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노국공주가 죽은 후 정치에 뜻을 잃고 신돈에게만 맡기자 점차 정치는 문란해져 갔는데

어느날 신돈의 꿈에 김유신이 나타나서는 


"내 아무리 노력해도 나라가 기울어 가는 걸 막을 수 없구나..내 비록 저승으로 간다만 니놈만은 용서치 않으리라"


라는 말과 신돈의 뺨을 후려치며 사라졌습니다.

깨어난 신돈의 뺨엔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신의 묘에서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는 일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외다리 의적(義賊) 강목발(姜木達)


의적 강목발은 선조때 출몰했다는 신출귀물한 도둑입니다.

강목발의 본명은 강업으로 지금의 진양군 대곡면 대방산 줄기에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기 직전 자(子-자시23:00~01:00)시에 한 도승이 찾아와 사립 밖에서 아이가 태어났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낳지 않았다고 하자 도승은 혀를 차고 돌아갔다가 

시간이 지나 축(丑-01:00~03:00)시에 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도승은 자시에 비범한 인물이 태어날 줄 알고 찾아왔지만 

때를 잘못 맞춰 대적이 날 시에 아이가 태어났구나 라며 혀를 끌끌 차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적의 상을 가진 탓인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업이 크면서 마을이나 건너 마을의 부자들이 재물을 도둑맞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낮동안은 평범한 사람과 같이 성장했으나 밤이면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부잣집에서 도둑을 맞았다 하면 없는 사람 집에 귀물이 쌓이는 것이었죠.

그는 머리가 비상한데다 힘 또한 장사였고, 

밤이면 높은 담장은 말할 것도 없고 삼간집을 펄펄 뛰어넘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습니다.


업에게 이름 대신 목발 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건 그가 외다리라 목발을 짚고 다녔기 때문인데 

그가 외다리가 된 사연은 두 가지가 전해집니다.


업은 선비인 숙부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숙부는 글공부를 게을리 하면서도 남의 눈을 속이는 능력이 뛰어난 조카가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우연히 조카가 밤에 담을 넘나드는 걸 본 숙부는 

하루는 그를 불러 방바닥에 엽전을 던져놓고 업에게 그것을 손도 안대고 가져가 보라며 시험해 보았습니다.

업이 잠시 있다 나갔는데 어느새 엽전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숙부는 조카가 도둑질을 하는 것에 분노해 방바닥에 놓인 목침으로 그의 오른쪽 다리를 내려처서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업이 성장하여 진주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길목인 단목(丹牧)에 사는 부자인 하백립의 집을 종종 털었다 합니다. 

신출귀물한 재주덕에 잡히지 않았지만 업의 숙부가 조카를 붙들어와 사죄를 했고 

하백립은 하인들을 시켜 업의 오른쪽 발을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외발로 생활하는 목발신세가 되었고 이후 강목발이라는 호칭이 붙여졌습니다.

목발은 이후 넘어 진주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기생집을 드나든 그는 돈도 잘 썼으며 술도 말술인데다 외다리지만 노래와 춤도 일품이어서 당대로서는 큰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그후부터 진주 인근의 살만하다는 부잣집은 도둑을 맞았고, 대신 가난한 집에는 쌀이며 돈이 쌓였습니다.

이때부터 의적의 신화는 삼남일대에 번져 나갔죠. 


그런데 관아에서 피해자들을 불러 조사해 볼라치면,그들은 한결같이 도둑이‘외다리’였다고 했습니다.

관아에서는 도둑을 강목발이라고 생각했으나 평소의 강목발은 목발에 의지했지만 

그 도둑은 목발에 의지하지도 않고 왼다리로만 신출 귀물한 능력을 선보였기에 증거가 없었죠.

강목발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관아에 붙들리는 신세가 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만

그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이후에도 도둑질이 계속되자 관아에선 강목발을 감시했지만 꼬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강목발의 딸이 큰병에 걸려 사경을 해맸습니다.

강목발은 의원을 모셔 오려고 했지만 관아의 감시를 받는 처지라 의원을 데려 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진주 목사가 네가 도둑인걸 시인하면 딸은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강목발은 목발을 집어 던지고는 한 식경(10분)내에 진주성을 세 바퀴나 돌아 자신이 외다리도둑인 걸 밝혔습니다.

결국 그는 구 법원 앞 객사 뜰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목발이 사형으로 집행되던 날 그 일대는 의적의 최후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중에는 목발의 은혜를 입은 가난한 자들이 그의 명복을 빌고자 모인 사람도 많았죠.

때가 되어 형리의 칼이 강목발의 목을 벴는데, 기이하게도 목발의 목에서는 피만 흐를 뿐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질겁을 한 형리들과 진주 목사는 목발을 향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발이 죽어 가는 소리로 대답하기를 

“탐관오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다 못 도우고는 참아 죽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주목사는 이곳만이라도 내 능력이 되는 한 백성들을 보살피겠다고 말했고 강목발은 그제서야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목발의 딸 역시 병이 치료받지 못해 죽고 말았죠.


김목발의 누님이 남편과 딸을 잃은 동생의 아내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녀의 꿈에 강목발이 나타나


"약조를 깬 원수놈인 진주 목사를 죽이겠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목발의 누이가 들은대로 진주 목사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