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바람에 실린 채 푸른 하늘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그 구름이 학교 운동장 벤치에 그늘을 넓게 만들었다.
그늘 속 나란히 앉은 두 남학생의 근처로 다가간다,
두 사람의 밝은 표정이 보인다, 마침내 말소리까지 들린다.
" 아, 경찰대학교는 개뿔. 경찰행정학과도 겨우 붙었네. 그나마 국립대라 다행이지,
사립이었으면 집에서 한 소리 들을 뻔 했어. "
" 너희 집 잘 살잖아. "
" 그러게 말이다. 좀 도와줘도 되는데 뭘 그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래미 강하게
키우시겠다고, 내 힘으로 혼자 벌어서 학비 내고 밥 먹고 다 하라시잖아. "
" 평소에 효자 노릇을 했어야지. 모든 결과는 습관의 거울인거야. "
" 쩝. 너답다. 너다워. 어쨌든 기원이 너는 좋겠다? 서울대를 다 붙고? "
" 고마워. 하지만 서울대는 안 갈거야. "
" 뭐? 왜? "
" 더 중요한 업이 나에게 생겼거든. "
" 업? 업이 뭔데. 새끼, 또 철학병 걸렸네. "
" 영민아.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라고 생각해? "
" 경찰대 붙는 거? 음, 약했나. 사법고시 합격? "
" 아니. "
" 하버드 수석졸업,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 미국 대통령 당선? "
" 전부 틀렸어. "
" 하~ 스핑크스 같은 새끼. 수능도 끝난 마당에 넌센스 퀴즈나 내고 말야.
아, 자살! 자살 맞지? 버러지 같은 놈들도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면서
끝끝내 살아가잖냐. 그러니까 자살이 가장 어렵지. "
" 무서운 대답이네. 하지만 그것도 아냐. "
" 으, 속 터져. 답이 뭔데. 들어나 보자. "
" 대오각성. "
" 대, 뭐? 뭐라고 했냐? "
" 대오각성. 쉬운 말로 '득도'라고 하지. "
기원의 쌩뚱맞은 답에 영민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넌 어떻게 갈수록 애가 사이비 같냐. 내가 말한 건 다 평범한 수준이네. "
" 득도가 뭔지 알거야. 이른바 '깨달음'이지. 어제 난 완전히 결정했어. "
" 뭘? "
" 난 불교를 학문으로써 전공할거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으로 여길거야. "
" 서울대도 갈 만한 네 성적이 아깝다! 등신아, 신앙도 적당히 가져야지! "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어. "
" 하나님 아버지! 이 새끼를 구원해주소서, 아~멘. "
" 이미 내 인생의 진로는 결정된거야. "
" 와, 이 새끼 눈깔 보소. 대박 진심이네. "
" ... "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 시선을 멀리 둔 기원의 눈동자 너머로,
한없이 넓은 그의 포부를 읽어낼 수 있었다.
" 땡중 되는거야 네 맘인데. 하나만 묻자. 대리운전인지 대오각성인지,
그걸 이루면 뭐가 되는데? 신이라도 되게 해준대? "
" 진리. 이 세상을 관통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겠지. "
" ... 참, 별난 놈이다. 너는. "
ㅡ
ㅡ
" 너희 아버지 알면 어쩌려구 그래, 서울대 가라니까, 서울대가 아니면
아무데나, 너 좋으면 괜찮으니까 제발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
" 어머니. 들어가세요. 날씨 추워요. 감기 드니까 나오지 마세요. "
" 네가 우리를 내팽개치고 간다는데 어떻게 내가 안 나와! "
" 따라오실거면 거기 가방이나 좀 들어주시구요. "
" 땡중 동영상 몇 개 보더니만 미쳐버렸구나! 너 어쩌려고, 돈은 있어?
밥은 어떻게 먹고! 아아아, 어흐흑ㅡ. "
'불효막심'.
네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기원은 씁쓸히 웃었다.
인생에는 많고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번뇌가 따라붙는 법.
상처주고 상처받고, 혈관처럼 서로 이어진 인연의 고리가 따뜻하고도 따가운 것.
' 죄송해요. 하지만 저에겐 이 길 밖에 없어요. 이해 받으려는 게 욕심인거죠. '
바닥에 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애써 외면한 채 집을 나서는 기원의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부산행 기차표가 달랑거렸다.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치는 2월 어느 날이었다.
" ... "
불교에 귀의할 뜻 없이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온 지난 날들,
마치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불태우듯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원은 버리고 또 버렸다.
마음아, 가벼워져라.
몸아, 홀가분해져라.
비워라, 비워라.
공허(空虛)로 가득 채워라.
ㅡ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기차는 선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기원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새 꼭 감겨 있었다.
그는 꿈 속에서 몇 해 전 혼자 찾아갔던 고성 폭포암에서의 기억을 만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장군 같은 기세의 주지 스님은 군중에 굴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똑똑히 각인되는 큰 목소리로 가르침을 이어갔는데,
수십가지의 이야기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말이 기원의 등골을 타고 흘러
다시금 그를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 사람 몸 나기 힘들고, 불법 만나기란 더욱 어렵도다. "
그렇다.
사람이 태어나는 건 기적과도 같은 확률을 넘어 그리 된 것이다.
그런 기적 속에서 불법을 만나기란 얼마나 더 어려운가?
그 깨달음 이후 기원은 불교 서적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상식'의 수준을 넘어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기원의 마음은 공허로 메워지고 있었다,
허무로 채워지고 있었다.
하루를 일이라 하여,
칠 일이 주,
주가 모여 월,
달이 빙긋 눈웃음을 몇 번 치더니,
지구가 몇 번이고 스스로 돌고 태양과 춤을 추면 비로소 한 해.
한 해, 두 해,
해가 열 번을 지나 그간 얼고 녹던 땅이 다시 얼고 또 녹았을 때.
바스락,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방금 밟고 지나간 자리 위로 검은 구두 하나가 올라섰다.
" 여긴가. "
제대로 찾은 모양이다.
고등학교 동창회 현수막이 걸려있는 한우 전문식당 앞.
' 많이 변했을까, 다들. '
영민은 신발을 벗어 정리해둔 채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 와~ 영민아! 진짜 오랜만이다! "
살짝 어색할 것 같던 마음은 변하지 않은 얼굴, 변하지 않은 목소리에 곧장 녹아버렸다.
봄이 올까 싶은 겨울이 그렇게 물러나듯, 순식간이었다.
" 야, 너 하나도 안 변했냐? 페이스북이랑은 또 다르네. "
" 그래, 몇 년 만이냐. 대학 다닐 때 한 번 보고. "
" 와, 애들 다 온거야? "
" 몇 명 더 올건데 우선 앉아. 한 잔 받아. "
" 그래. 좋지. 오늘 아주 죽어보자. "
짠,
몇 번을 부딪친 잔이 다시 깨지기라도 할 듯 강하게 맞닿았다.
그 안에 담긴 소주가 찰랑거렸다.
" 크으으. 너 만나고 싶었는데, 서로 바빠서 연락하기 좀 그렇더라. "
" 그래, 알다시피 나 경찰 아니냐. 요새 정말 바빠. 인력을 늘려도 일이 안 줄어. "
" 그래 그래.. 너 경찰이지. 고생 많다. 짭새 새끼. "
" 까불기는. 확, 체포해버릴라. "
" 잡아가라, 얼마나 좋냐. 헬조선에서 유일하게 공짜로 밥 주고 운동 시켜주고,
나름대로 그 정도면 헤븐조선이지. "
" 미친 놈~... 잔 비었어. 잔이나 채워줘. "
" 어어어, 누가 한 명 온 거 같은데. "
" 다 지금 술 취해서 헤롱거리는데 오긴 누가 와. "
" 왔잖아아. "
" 으엑, 진짜네. 우리 동창 맞아? 무슨 도사가 왔어... "
" 영민아, 쟤 기원이 같은데. "
" 그 도사 이름 좋네에. 기원... 기원? 기원?! "
방에 들어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동창들을 바라보는 남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산에서 호랑이라도 잡다가 나온 듯한 풍모의 남자.
" 다들 오랜만이다! "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보고, 가물가물한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때,
" 야, 구기원! 새끼야! 너 살아있었구나! "
별안간 벌떡 일어난 영민이 비틀비틀 다가가 기원을 꽉 안았다.
" 너 불교 배운다더니 심마니가 된거야 뭐야? 꼴이 왜 이래? "
" 그렇게 됐다. 하하. "
" 완전- 도사가 되가지고. 뱀 몇 마리 잡아왔냐? 앉아.
다들 기억 안 나? 서울대 갈 줄 알았더니 스님 되러 간 기원이!
우리 학교 전교 1등! "
" 아ㅡ! 구기원! 진짜?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진짜 궁금했었는데! "
생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모두들 술기운도 잊은 채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육회 몇 접시와 소주 열댓병이 다시 들락날락거렸다.
" 안주도 못 먹고, 술도 못 먹고, 대체 왜 왔냐? "
" 너희 보러 왔지. 잘들 지내는구나 싶어서 기분 좋네. "
" 만족은 하는거야? "
" 살아있는 거 보면 가끔 웃고 지낸다는 말 아니겠어? "
" 야, 여전히 철학자네. 대단하네. 대국적으로 한 잔 하자! "
" 전부 잔 들어봐~ 기원스님께 한 말씀 들어보게. "
다들 잔을 들고 기원의 말을 기다릴 때 영민이 기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 기원아,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 '
' 그래. '
덕담 한 마디 이후 잔이 오가고, 그 자리가 한 시간을 더 가서야 끝났다.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몇 몇은 대리운전을 불러다가 짐짝처럼 실려가고,
할 얘기가 남은 몇몇은 짝을 지어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깊은 새벽, 그때는 해가 떴었지만 지금은 달이 높이 떠있었다.
" 너,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거야? 스님이 되긴 된거야? 머리는 왜 산발이야.
난 처음에 무슨 거지가 들어온 줄 알았어. 아. 기분 나쁘게 들리겠구나. 미안. "
" 하하하. 전혀 안 나빠. 난 내일 다시 산으로 들어갈거야. 산에서 또 들어가야
갈 수 있는 동굴로 들어가서 마음을 다시 닦아야지. "
" 좋겠다. 아니, 외롭고 힘들겠지만... 뭔가 홀가분할 것 같네.
난 경찰이라 그런가, 요즘 좀 그렇다. "
흐려지는 말꼬리에 기원의 눈썹이 갸웃거렸다.
" 고민 있구나. 말해봐. "
" 아냐, 아냐. 경찰 일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신경 쓰지 마. "
" 괜찮아. 말해봐. 내가 어디 가서 그런 걸로 소문낼 것도 아니고. "
" ... 그래, 너는 말해도 될 놈이지. 너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겠어. "
기원의 따뜻한 말씨에 영민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ㅡ
ㅡ
소매치기, 도둑놈, 길거리 양아치, 온갖 사회의 시정잡배들과 조우하면서
단 한 번도 쫄아본 적 없는 영민은 그야말로 경찰이 천직인 사내였다.
발에 땀나도록 뛰어 사건을 해결하고, 파출소로 돌아와선 다시 막내직원으로서
온갖 잡무를 도맡아하며 얻은 신뢰는 그에 대한 소문을 만들었고,
소문은 마침내 경찰서 내를 돌고 돌아 그를 본청 수사과로 발령나게 했다.
순경 임용 후 심사로 한 번, 특진으로 또 한 번, 5년만에 경사로 진급한 뒤
경위 승진 후보자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수사과의 젊은 피.
그런 그에게 주어진 새 사건은 의문투성이의 '연쇄자살' 사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관할 구역 내에 자살사건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불황 탓, 사회 분위기 탓으로 돌렸으나 전년 대비 자살자 수가 2배 이상을
넘어가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막노동꾼부터 대학교수까지, 남녀와 노소, 능력의 높고 낮음을 가림없이
자살자는 다양했고, 한 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웃는 시체'.
연쇄 자살로 희생된 자들의 시체는 모두 기쁘게 웃고 있었다.
분명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건만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서 하나가 포착된다.
증인 A, 증인 B, CCTV 1, CCTV 2,
짧은 목격담과 짧은 영상기록이 모자이크처럼 모이고 모여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자살자들의 두번째 공통점.
그들은 죽기 전 '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사람은 스스로 자살하거나, 사라졌다.
CCTV에 포착된 인상착의와 얼굴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배 절차에 돌입하려던
어느 날, 상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 과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수사를 끝내자니요. 이제 증거가 나오고 있는데요. "
" 영민아. 이건 좀도둑 잡아서 건수 하나 올리는 수준의 일이 아니야.
내 말 들어라. 참고로 더 윗선에서 압력 넣은거야. 우리 생각보다 더 큰 사건이야. "
" 우리 관할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때 우리가 먼저 검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이 자식이, 과장한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짜식아, 나도 너 용감한 줄 알아!
나도 너 좋아해, 근데 임마, 이건 그냥 용의자 A만 잡으면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니더라니까? 이럴 줄 알았지, 자, 명함. 본청 국장이 직접 서명해놓은 명함이다.
만나볼 수 있을거야. 관외출장신청서 올리고 바로 다녀와. "
" 국장님만 설득하면 제가 그 여자 잡아서 감방 쳐넣어도 됩니까? "
" 그래. 사실 국장은 네가 올 줄 알고 있는 눈치야. 만약 이 사건 맡게 된다면
하나 충고, 충고라기보다는 부탁이지. 부탁하건데, 목숨 조심해. 잡범이 아냐. "
" 다녀오겠습니다! "
" 내 말을 듣기는 들은거냐, 저 자식... "
평소 올 일 드문 본청에 들어서자마자 경비원들이 영민에게 신분증과 방문 목적을
요구했다. 영민은 대답 대신 국장의 명함을 내밀었고, 경비원들은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안내했다.
국장실에 들어서자 국장은 영민의 공무원증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보더니,
비서 직원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요청한 뒤 방의 불을 끄고 모니터를 주시하게 했다.
" 자네가 용의자로 지목한 여자를 우리는 이미 50년 전부터 추적하고 있었어. "
" 50년이라구요? 국장님, 죄송하지만 그 여자는 많이 쳐줘야 삼십대 초반입니다. "
" 외양은 그렇지. 기막힌 건 일본은 200년 전부터 추적하고 있다네. "
" 예? "
" 그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행정상 몇 번이나 기록이 바뀌었고
지금도 다른 이름을 쓰고 있겠지만 일본에서 부르기를 '아카이 사쿠라',
우리는 그녀를 '홍벚꽃'이라 부르고 있지. "
" 홍벚꽃...? "
" 그래.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 여자. "
" 우리 수사력에 포착되었으면 지금 감방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죄목이 뭐지? "
" ... "
" 그녀가 사람을 직접 죽이기라도 했나? "
" 겉으로 보기에는 전원 자살이죠. "
" 그래. 그녀는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화술을 지녔네. "
" 화술이라구요? "
"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최면도 아니고 환각도 아냐. '자살 당한'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자 스스로의 의지로 자살한걸세. 그녀의 설득에 의해서. "
" 설득이라고 하셨지만, 거기까지 파악되었으면 굳이 살인죄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었을텐데요. "
잠시 정적이 돌더니, 국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그녀를 취조한 건 한 두 번이 아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평범한 인간은
버티지 못 할 수준의 강력수사를 감행했으니까. 결과? 전부 자살했어. "
" 경찰들도 당했단 말입니까? "
" 그녀를 담당하던 나의 선배, 그 선배의 동료, 그 선배의 선배,
그들보다 앞서 그녀를 담당하던 자와 팀원들, 그보다 더 앞선 자들,
무수히 많은 우리의 선배 동료들이... 자살 당했지. "
" ... "
" 행복에 겨운 새신랑, 쌍둥이 애 아빠, 냉철한 엘리트 수사관,
어떤 조건, 어떤 능력을 가진 그 누구라도 그녀의 설득 앞에선 무너지고 마는걸세. "
" 대체 무슨 설득을 하길래 자살한단 말입니까. "
" 녹음해본 적이 있었어. "
" ... "
" 그 설득, 녹음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녹음을 하기 위해 들었던 담당자가 죽었고,
그 녹음을 복구한 후 듣던 기술자와 동료 세 명이 각각 한 두시간을 전후로 자살했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증거나 자료로 채택할 수 없었어. 결국 그 계획과 관련된 모든
기록은 폐기되었네. "
" ... "
" 말을 잊은 모양이군. 그러니 누가 이 사건을 맡으려 하겠나? 혹시 자네가? "
" ... "
" 자네, 인사기록카드를 보니 지방에서 상당히 장래가 유망한 경찰관이던데.
적당히 경제사범이나 잡다가 간부로 승진해서 결혼도 하고, 후배들도 길러야지.
잘 생각해. 아무리 유능한 경찰관이더라도 목숨은 오직 하나뿐이야. "
" ... "
" 자네 관할에서 벌어지는 연쇄 자살 사건의 진범은 이 수사국장이 즉보해주겠네.
홍벚꽃. 그 여자가 범인이다. "
" ...홍, 벚꽃. "
" 그녀를 잡을 수 있다면 잡아봐. 하지만 잡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자네
관할 경찰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그녀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까. "
" 국장님. 감사했습니다. "
" 택시 불러놨으니 타고 내려가게. 자네 정도 열정을 가진 경찰관이라면 이런 사실을
듣고선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 할거야. 삼일 밤낮 잠 설치겠군. 잘 가게. "
" ... "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영민은 본부를 나와,
국장이 불러놓은 택시에 올라타야만 했다.
ㅡ
ㅡ
" 어떨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
" ... 우선, 굉장히, 신기하네. "
영민의 물음에 기원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기원의 눈에는 오래 전 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던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 오직 말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한다. 그 말이지... "
흠~, 으흠~ 거리는 추임새와 함께 생각에 깊이 잠겨버린 기원을 보며
영민은 입을 쩝쩝 다셨다.
" 미안하다. 내일 산에 들어가는 스님한테. 신경쓰지마. "
순간 기원은 별안간 박수를 크게 쳤다.
" 결정했어! "
" 뭘? "
" 산으로 가는 건 미뤄도 괜찮으니까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어졌어. "
" 미친 새끼, 너 그러다 죽어. "
" 내가 깨우친 쪽이 진리에 가는 길이 맞다면, 홍벚꽃을 깨우치게 하지 못 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 너 출근 시간 언제야? 가서 수사기록 좀 보자! "
" 완전 막무가내 아냐, 저 자식. "
자신의 만류에 답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기원을 쫓아가며,
영민은 십 년만의 동창 상봉이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 ... 홍벚꽃, 머리에 털 난 뒤로 이런 인물은 처음인걸. "
" 뭘 좀 알아내셨습니까, 기원스님. "
늘어지게 하품하며 무심히 질문하는 영민과 달리 기원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이미 경찰서에서 밤을 새운 둘이었다. 책상 위로는 노란색 파일철이 잔뜩 올려져
있었기에 마치 압수수색 당하는 현장을 방불케 했다.
" ...그게 말야. "
기원이 입을 열고자 하는 순간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 김 경사님, 일찍 출근하셨지 말입니다? 옆의 분은 누구십니까? "
" 동훈이 왔냐. 인사해. 사설탐정이셔. 내가 고용했어. "
" 사설탐정... 아직 합법적인 직업은 아니잖습니까? 진짜로 누구십니까? "
" 꼴이 이래서 그렇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야. 우리 팀의 브레인이 되어주실 분이니까 정식으로 소개할게.
구기원이라는 분이고, 내 고교 동창이자 이번 연쇄자살 사건 수사에 핵심적인 도움을 주실 분이야. "
" ...최동훈 경장입니다. "
어색한 분위기 속에 기원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굳어있던 표정을 슬며시 푼 최동훈 경장이 커피 세 잔을 타기 시작했다.
" 그럼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겁니까? "
" 그래. "
영민이 대답했다.
" 비공식적인 수사인만큼 인력과 예산에 대해서도 재량껏 편성하면 된다고 확답받았어.
만약 홍벚꽃을 잡을 수 있다면 저승사자라도 꼬셔오면 된다는 얘기지. "
" 그래야지 말입니다. 잡을 수 있다면. 경사님, 커피 드십쇼. 구 탐정님, 커피 한 잔 드시고 하십쇼. 열심이십니다. "
" 고맙습니다. 그리고 탐정은 아닙니다. 땡중입니다. 발음은 비슷하네요. "
ㅡ
열흘 전만 하더라도 용의자로 지목된 여자를 체포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자살자와 접촉한 사실이 있는 여인으로부터 자백만 받아내면 종결될 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민이 수사국장을 만나고 온 후 수사의 진행은 멈춰버렸다.
처음엔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50년에 걸친 추적? 더군다나 일본에선 200년?
그렇다면 경찰이 귀신을 쫓고 있단 말이냐며 웃던 이들은 본청에서 보내온 택배의
어마어마한 물량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방대한 양의 문서와 자료, 와 으로 표시된 제목을
따라 분류하는데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나마도 일부에 불과했던지 택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지하 문서고에까지 택배 상자가 꽉 들어차버렸다.
" 이래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고 싶은 사람만 남고, 아니면 빠져요. "
영민의 말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고,
끝내 곁에 남은 건 최동훈 경장 한 명 뿐이었다.
" 넌 왜 안 가냐. "
" 재밌잖습니까. "
" 평소같으면 가라고 하겠는데, 이번엔 네 힘 좀 빌리자. 혼자선 못 쳐내겠어. "
" 제가 잡으면 제 실적입니다. "
" 죽지나 마라. "
" 염려 감사합니다. "
우선 검토할 문서들로 캐비넷 두 개를 꽉 채우고나자 서장이 그들을 찾는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 두 달. 그 안에 해결해. 만약 두 달 안에 안 되면 손 떼는거야. 알겠지. "
" 서장님. "
" 토 달지마. 간부들은 자네들 잃기를 원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어느 바보가 부하를 사지로 내모나? 못 잡으면 수사 종결이야.
그 이후론 본청에서 판단하겠지. "
" ... "
" 노파심에 해주는 말인데, '홍벚꽃'. 직접 대면하지말고. "
ㅡ
" 잠시 자리 비울테니까, 동훈이 네가 탐정님께 자세한 브리핑 좀 부탁한다. "
" 다녀오십쇼. "
영민이 나가자 기원이 물었다.
" 다른 자료는 어디에 있죠? "
" 벌써 다 보셨습니까. 빠르십니다. 절 따라오십쇼. 문서고에 가야합니다. "
" 네. "
문서고로 가는 길에 만나는 경찰서 직원들은 땅거지 같은 기원의 차림에
의아해하면서도 나란히 걷고 있는 동훈을 보면서 무언가 납득하는 눈치였다.
" 이미 소문은 퍼진 모양이네요, 최 경장님. "
" 무슨 짓을 해봤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겁니다. 본청에 쳐들어간 경사,
그 경사 따라 뛰어든 경장, 짬도 안 되는 것들 둘이서 미제사건 수사팀 구성.
탐정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데려와도 그러려니 할 겁니다.
자, 열렸습니다. 이 안에 가득한 파란색 상자가 전부 홍벚꽃 관련된 겁니다. "
" 끔찍하네. 두 달 안에 잡는 게 아니라 읽기만 해도 빠듯하겠는걸. "
" 이렇게 파일이 쌓이도록 그녀를 확실히 잡을만한 증인도, 증거도 구하지 못 했습니다. "
" 죽음에 이르도록 권유하는 모양인데, 살인 방조죄가 성립하지 않나요? "
기원의 물음에 동훈을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 자살하는 그 순간에는 홍벚꽃이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자살자들은 홍벚꽃과
헤어진 후 머지 않아 목숨을 끊었지만 막상 홍벚꽃이 그 현장을 지켜봤다거나
자살하는 행위에 협조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방조죄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어느새 기원의 손은 파일을 집어들었고, 눈은 빠르게 내용을 훑어가고 있었다.
- 1986.01.03. 서울시 노원구 ○○빌라 201호 -
피해자 : 이 용 호
나 이 : 34세
직 업 : 기자
자살방법 : 흉기를 이용한 경동맥 절단
사인 : 과다출혈
- 1986.02.17. 진주시 문산읍 ○○리 1024번지 -
피해자 : 박 점 순
나 이 : 65세
직 업 : 무직
자살방법 : 소류지에서 투신
사인 : 익사
- 1986.03.09. 울산시 중구 염포동 ○○아파트 A동 408호 -
피해자 : 이 경 주
나 이 : 18세
직 업 : 학생
자살방법 : 옥상에서 투신
사인 : 쇼크 및 과다출혈
- 1986.04.28. 진도군 ○○읍 241-8번지 -
피해자 : 오 명 환
나이 : 22세
직업 : 군인
자살방법 : 피복을 벗긴 전선으로 감전 유도
사인 : 감전사
기원은 무언가 수상한 점을 눈치챈 듯 읆조렸다.
" 한 달에 한 번이잖아. "
" 정확합니다. 한 달에 한 명씩입니다. "
" ... 자살은 전국적으로 하루에 수십명씩 발생할텐데. 그 '특징'을 통해서 분간하는 건가요? "
" 특징이라 하시면 익히 알고 계시는 그 '미소' 말씀입니까? "
기원은 파일을 덮은 채 동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보통 자살자들은 고통에 절규하던지, 서서히 죽음에 이르러 마땅히 표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홍벚꽃'을 만난 후 자살한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
" 최근에도 그런가요? "
기원의 물음에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 확실합니다. 웃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을 듣곤 기원은 자료 속 시체들의 표정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ㅡ
" 여기 계셨수? 난 무서워서 둘 다 도망간 줄 알았네. "
" 영민이 왔어? "
" 오셨습니까, 김 경사님. "
" 밥은 먹고 해야지. 뭐 시킬까. 비빔밥? "
" 간짜장. "
기원의 뜬금없는 주문에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이 괴랄해졌다.
" 고기 빼달라고 할까? "
" 탕수육도 시켜줘. "
기원의 추가 주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 에이, 간짜장 세 개, 탕수육 하나! 콜! "
" 찬성입니다. 문서고 정리 좀 부탁드립니다. 전 올라가서 밥 시키고 공문 좀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
동훈이 올라가자 기원은 영민에게 넌지시 물었다.
" 어디 다녀온거야? "
" 그녀한테. "
" 너, 만났어? "
" 아니.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똑똑히 보고 왔지. "
" 지난 한 달 동안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웃으며 자살했어. 이 지역에서. 맞지? "
" 그래. 그래서 예의주시하고 있는거야. 한 달에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더 이상 소극적으로 대응할 순 없어. "
" 영민아.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
" 방법? "
영민이 기원에게 바짝 붙었다.
기원의 '방법'을 듣는 영민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ㅡ
후루룩, 짜장면 먹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 김 경사님, 페이스북이랑 트위터에 광고는 갑자기 왜 올리라고 하십니까? 진짜
본청 국장님이 돈 갖다쓰라고 한 건 맞습니까? "
" 우리 월급에서 뗄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써. 광고는 메이저 SNS 위주로
골고루 다 실은 거지? 내일은 5대 신문사에도 올리고. 주요 공모전 사이트에도 의뢰해서 배너 띄울 수 있는지
알아봐. 사상 최초의 '말빨 공모전'. 어때. "
" ...위험한 짓입니다. 그 내막이 알려지기라도 해보십쇼. "
" 단무지 좀 주세요. 최 경장님. "
세 사람의 늦은 저녁 식사를 알려주듯 보름달은 벌써 모습을 감췄다.
빈 그릇을 내놓을 무렵부터 전국에서 문의 전화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기원이 내놓은 '방법'과 관련된 전화였다.
ㅡ
윤성호 씨는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칭했고, 때론 '낭만협객'이라 칭했지만
세상이 그를 칭할 때는 '키보드 워리어'라고 했다.
주요 일과는 독설. 주로 정부의 시대 착오적인 정책이나 세계 주식시장의
불확실성 등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필력으로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 필력은 뛰어난지라 몇 몇 팬을 거느리곤 있었지만 문제는 생계.
직장에서 쫓겨나며 받은 퇴직금도 다음 달이면 땡인지라 돈 한 푼이 궁했다.
" 알바천국에 왜 할만한 알바가 없냐. 천사들이 다 가져가셨나... "
2페이지, 3페이지, 택배 상하차, 조선소, 공사장 인부...
몸 쓰는 일은 하기 싫다는 핑계로 한참을 헤매이다 마침내 독특한 문구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이게 뭐야? "
[ 당신의 말빨을 캐스팅합니다 ]
모집 인원 : 공고 종료시까지
일당 : 삼백만원
평소 자신이 한 말빨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은 어디 가서 말로 져본적이 없으신 분,
혹은 어떤 말을 들어도 주눅들지 않는 강력 멘탈을 지니신 분,
아래 연락처 혹은 링크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삼백만원? 이정도면 두 달은 버텨보겠는데. "
사이비 종교나 인신매매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막상 핸드폰에는
연락을 위한 번호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ㅡ
'광고보고 전화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듣고 싶은데요'
'구인광고 보고 전화했어요, 말빨 자신있는데 삼행시 하나 운 띄워주세요'
'일단 의심스럽지만 연락 드려보는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
윤성호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통화가 최동훈의 휴대전화를 울려댔다.
링크를 통한 연락도 어마어마했기에 상당수의 연락은 영민에게 돌려졌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연락을 받는 동안 기원은 묵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간 보기용으로 전화한 사람과 다르게 처음부터 접수를 목적으로
전화한 사람들은 대부분 뛰어난 논리성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신중하면서도 섬세하게 자신의 의중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문장 속 핵심 요소를
파악하는 모습이 과연 '말빨'을 자부하는 사람들다웠다.
" 와. 목 다 쉴 뻔 했네. 이제 오는 전화는 적어놨다가 그냥 내일 연락주자. 동훈아, 수고했다. "
" 수고하셨습니다. 탐정님,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전화가 아주 박이 터집니다. "
" ...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 "
숨을 고르던 경찰 2인방이 기원의 말에 다가갔다.
" 1999년 7월에는 자살자가 없었어요. "
" 뭐?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 다른 파일에 실린 거 아냐? "
" 아냐. 대강 훑어보긴 했지만 다른 파일에서도 찾아볼 순 없었어. "
"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
" 아니에요. 그럴리는 없어요. "
기원의 검지 손가락이 펼쳐졌다.
" 첫 번째 가설, 99년 7월에 홍벚꽃이 움직이지 않았다. "
이윽고 가운데 손가락도 펼쳐져 'V'를 그렸다.
" 두 번째 가설, 누군가 죽었지만 수사에서 누락되어 단순한 자살로 처리되었다. "
그 말에 영민의 고개가 끄덕였다.
" 두 번째 가능성도 무시 못 하지. 모든 자살이 다 발견되는 건 아니니까. "
그러자 기원은 영민을 쳐다보더니 주먹을 내렸다.
" 아니야. 오히려 첫 번째 가설이 가능성은 더 높아. "
" 왜? "
" 너도 파일을 봐서 알겠지만 모든 희생자는 자택이나 직장, 학교 같이
가장 발견되기 쉬운 장소에서 자살했고 하루 사이에 발견되었어. "
" ... "
그 말은 정확했다. 50년 동안 이어져 온 월 1회의 연쇄 자살 속에서
희생자들은 하나 같이 가장 발견되기 쉬운 장소에서 자살했으며 하루도 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 자살자가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은 있지만 홍벚꽃이 접근한 인물들은 달랐어.
그들은 부패가 진행되기도 전에 항상 발견되었잖아? 항상 그 '미소'와 함께 말야.
마치 발견되기를 노린 것처럼, 웃으면서. "
" ... 그렇다면. "
영민의 말에 흥분이 섞였다.
" 홍벚꽃은 우리에게 일부러 발견되게끔 그들을 조종하는거야.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신호를 보내는거지.
그 미소를 통해서. "
" 후. 그래, 한 달에 한 번뿐만이 아니라, 일부러 희생자로 하여금 무언가 전달하려고 한다,
좋아. 그럼 대체 뭣 때문에? "
" ...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고민 중인거야. "
영민의 콧소리가 한참을 씩씩거릴 즈음 동훈이 한 마디를 보탰다.
" 일본 측에 한 번 물어볼까요? 일본도 그녀를 쫓고 있었다면 웃는 시체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파악해왔을 겁니다. "
" 부탁할게요. 동훈 씨. "
" 동훈아. 내 책상 서랍 안에 보면 명함 하나 있어. 일본 측에서 아카이 사쿠라를
전담했던 수사관 전화번호야. 나한테 가져다 줘. 내가 물어볼게. "
" 바깥 공기나 좀 마시고 올까. 아직 수행이 멀었구나, 나는. "
영민과 동훈이 일본에 급히 연락하는 동안 기원은 밤거리로 나섰다.
ㅡ
나이가 사십줄에 들어보이는 한 사내가 사무실 쇼파 위에 벌렁 누워있었다.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듯 불손한 태도를 한 채 다리를 달랑달랑 떨어댔다.
" 뭡니까? 저 인간. "
열 받은 표정의 동훈을 만류하는 건 기원이었다.
" 제가 데려온 히든 카드에요. 김중호 씨라고... 나중에 소개할게요. "
" 우이씨. 무슨 히든카드가 저렇습니까. 아무튼 곧 시작이니 이동하시죠. "
" 네. 영민이가 미리 가있으니까 장내는 정리되어 있을 거에요. "
" 여보쇼. 김준호? 김장호? 아저씨! 따라오세요. 안 들려요? 이동한다구요! "
기원이 다가가 직접 업다시피 한 뒤에야 중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ㅡ
수 백명의 인원이 모여 웅성대는 강당 안,
세 사람이 들어서자 영민이 기원과 동훈을 맞이했고 중호는 자연스레 어느 빈 구석을 찾아가 드러누운지 오래였다.
" 자, 잠시 장내를 정리하겠습니다. 주목해주세요. "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기원의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멎었다.
" 중앙에 보이는 책상을 기준으로 줄을 서주세요. 면접을 시작합니다. "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중앙의 책상에 앉은 기원의 앞에 첫 번째 면접자가 다가섰다.
" 안녕하세요. "
" 얼굴이 왜 그렇게 생겼어요? "
그 말에 면접자가 잠시 머뭇대다 이내 능글맞는 미소를 지었다.
" 제 얼굴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드셨는데, 여태껏 불량품이라고 생각해서
반품할까 생각했거든요? 근데 면접관님 얼굴 보니까 반품 대신 별점 5점 그냥 드리려구요. "
그 말에 웃는 기원의 표정이 의미심장해보였다.
" 통과하셨습니다. 뒤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제 옆에 앉아주세요.
자, 공지하겠습니다. 이제 이 분께도 가셔서 면접을 보시면 됩니다.
이 분이 인정하면 통과, 인정하지 않으면 탈락입니다. 통과하신 분은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와서 이 옆으로 나란히 앉아주시면 됩니다. "
그 공지를 시작으로 지독한 설전이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맞서는 사람,
그 와중에도 누군가를 지혜를 발휘하고 기지를 발휘했다.
화가 나서 우는 사람도 있었고,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리는 면접자들에 의해 거진 정리가 되었고
점점 심사위원은 늘어나고 면접자는 줄어들어 2시간이 지나자 백 명 남짓한
인원만이 장내에 남아있었다.
마침내 그 누구도 면접을 보려하지 않았다.
" 좋아. 이제 시작인거야. "
기원이 책상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섰다.
저마다 책상에 앉아있는 통과자들이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기원을 노려봤다.
" 여러분은 3일 뒤 다시 이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
본선인가, 또 말싸움인가, 이번에는 쉽지 않겠는데, 여러 잡담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기원의 다음 말이 장내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 이 장소에서 한 명의 여자를 말로써 굴복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
강당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 그녀는 지독한 죽음 찬양론자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합쳐 공동으로 그녀를 상대해야 합니다. "
그 말에 통과자들의 불평이 곳곳에서 날카롭게 터져나왔다.
" 그깟 여자 하나 이기라고 우릴 모이게 한다고? "
" 나 혼자 해도 충분하거든요?! "
" 아~ 다들 아가리 싸무세요, 그 날 저 혼자 와도 충분하니까~ "
흥분한 말처럼 날뛰는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원이 설명을 이어갔다.
" 만약의 경우에 여러분은 그녀에게 설득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앞의 봉투를 가져가세요. 내용물은 현금 삼백만원과 각서입니다.
어떤 설득을 당해도 자살하지 않겠다는, 자살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입니다. 그 날 오셔도 자유, 오지 않으셔도 자유입니다.
다만 그 각서의 의미를 3일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그 자리에서 대부분의 통과자들이 각서를 제출했고,
기원과 영민은 이미 던져진 주사위를 위해 눈동자를 다시금 반짝였다.
ㅡ
" 네, 최동훈입니다. 아! 네. 맞습니다. 그대로 내보내주세요.
네. 맞습니다. 사람 찾는 광고에요. 그렇게 실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대로 보내주세요. "
동훈은 광고 업체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업체와 한 판, 저 업체와 한 판.
이름도 불명. 나이도 불명.
정체 불명의 여인에게 일방적으로 보내는 광고. 아무리 돈만 주면 실어주는
광고라지만 업체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 벚꽃, 설득, 가르침 >
장소와 시간 외에는 단 세 마디 단어가 전부인 기묘한 광고가 전파를 타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시각 동훈 옆에선 영민이 경찰서와 보건소 등 협조를 구할 기관에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 사람이 많이 모여서 그럽니다, 앰뷸런스가 적어도 두 대는 필요해요.
소방서에서는 구급대원 보내주기로 했구요, 저번에 저희가 행사 때 주말에
교통정리 요원 많이 보내드렸잖아요, 저 한 번 도와주십쇼. 부탁합니다. "
...
" 와, 정말 죽다살아났지 말입니다. "
" 동훈아.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고생 많다. 임마. "
" 근데 김 경사님, 탐정님. 진짜 홍벚꽃이 올지 궁금합니다. "
" 홍벚꽃은... 반드시 와요. 제 시나리오대로 올 겁니다. 최 경장님. 제가 말해놓은 건 도착했나요? "
기원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대답했다.
" 아. 그건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는 기원,
그런 기원의 묵상이 길어진다.
하루, 이틀,
마침내 삼일.
새벽 일찍 목욕을 마친 기원은 머리를 짧게 깎고 수염을 밀어 말끔해진
모습으로 강당에 나타났다.
" 어라, 수염 밀었네. 몰라뵐 뻔 했습니다. 스님. "
" 중요한 날이잖아. "
기원은 영민의 물음에 답하며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미 절반 이상이 착석해있는 가운데 저마다 상기된 표정이 눈에 띄었다.
" 공기가 축축한게... 다들 긴장 되는 모양이다. "
기원이 자리에 앉고, 영민은 여전히 일어선 채로 서성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 이제 한 시간 남았어... "
40분이 지나자 한 명의 낙오 없이 면접 통과자 모두가 도착했다.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천차만별, 변호사, 교사, 대학생, 종교인, 기자, 영업사원 등
서로 다르지만 목적만은 같은 사람들이 앞으로 있을 설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약속시간이야. 영민아. 동훈 씨와 함께 나가있어줘. "
" 그래. 조심하고. 이거, 동훈이가 주라던데. "
" 고마워. "
영민으로부터 무언가 건네받은 기원이 물건을 꺼내자마자 강당의 문이 열렸다.
장내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침묵에 젖었고,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있었다.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 색 기모노를 입고 땋은 머리가 허리를 지나 바닥까지 닿을 듯한 여자.
날카로운 고양이를 닮은 얼굴을 한 여자.
여자의 뒤를 이어 창백한 얼굴의 꼬마 한 명이 함께였다.
" ... 홍벚꽃. 왔구나. "
기원이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여인은 누구의 안내 없이도 능숙히 단상 위에 올라섰다.
" 쪽바리 년 같은데, 한글 공부는 다 하셨나? "
" 고작 당신 따위가 우리 상대가 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아? "
"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고 끝냅시다~ "
기선제압을 위한 사람들의 도발이 계속되는 와중에 아주 상냥한
목소리가 또렷히 들려왔다.
- 여러분 -
기원은 황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뒤집어썼다.
주위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방음기가 그 정체였다.
' 시작이다. '
-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
화술의 달인 백 명과 홍벚꽃 한 명간의 대결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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